백두산정계비는 국경을 확정했을까, 국경지대를 만들었을까?

김선민 『인삼과 국경』에서 대답의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1712년의 조사와 정계비는 청과 조선이 경계를 확인한 중요한 사건이지만, 오늘날과 같은 선 하나를 완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두만강 수원에 대한 정보는 여전히 불분명했고, 두 나라는 서로 다른 목적을 품은 채 넓은 국경지대를 받아들였습니다. 지도와 비석은 경계를 기록하는 도구이면서 황제의 권위와 각국의 이해를 조정하는 정치적 장치였습니다.

청은 장백산과 만주의 지리를 조사함으로써 제국의 통치권과 만주인의 정체성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조선은 조사에 협력하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자국 강역을 지키기 위해 정보의 모호함을 활용했습니다.

정계비를 현재의 국경 분쟁에 곧바로 대입하면 당시의 경계 감각을 놓칠 수 있습니다. 기록이 무엇을 확정했는지뿐 아니라 무엇을 일부러 남겨두었는지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1. 85~101쪽

    장백산을 제국의 지리로 만들기

    측량과 지도 제작이 청의 동북 변경을 황제의 통치 공간으로 가시화한 과정을 설명합니다.

  2. 101~126쪽

    1712년 조사와 정계비의 모호함

    청과 조선이 서로 다른 목적을 품고 조사에 참여했으며 두만강 수원과 경계의 해석이 완전히 하나로 고정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3. 225~233쪽

    19세기에 다시 읽힌 비석

    근대적 영토 분쟁 속에서 정계비가 재발견되고 과거의 문구가 새로운 국경 주장의 근거로 바뀌는 과정을 살핍니다.

달리 표현하면 청의 동북방과 서북방에서 제국의 세력 확장을 완수한 것은 군대가 아니라 지도였다.
— 『인삼과 국경』, 94쪽